Rabbit Family Hopping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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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bbit Family Hopping Around, C-Print,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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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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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럼 루시다

미학, 미술비평 강수미
1. 어두운 환영과 밝은 환영
중국의 한 황제는 침실에 그려진 폭포 그림의 낙수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고, 그리스의 화가 파라시오스는 그림을 가린 커튼을 그려 당대 최고의 화가 제욱시스의 눈을 속였다고 전해진다. 이미지의 역사는 사람을 미망에 잠기게 하고, 이성의 눈을 속인 시각이미지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한갓 모조 ? 환영 ? 가짜에 불과한 것들이, 살과 피의 육체로 숨쉬고 정신으로 세계를 판단하는 인간 실재를 속이고 불안하게 동요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어두운 환영’(Simulacrum Obscura), 그러니까 자신의 모조성, 가상성을 은폐하면서 명료해야 할 이성의 의식을 흐릿하게 한다는 의미로 이렇게 이름 붙여볼 수 있을 것이다. 이마고(imago), 시뮬라크럼(simulacrum)을 어원으로 하는 이미지가 미술 일반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미술은 기원에서부터 이 이미지를 원천으로 해왔음을 생각할 때, 이미지에 부여됐던 모조와 환영이라는 속성은 고스란히 미술의 속성으로 인식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언제나 이미 실재의 ‘모방’이며, ‘환영’이고 ‘재현’이었다. 그런데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미술은 자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어두운 환영’이라는 속성으로부터 벗어난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재현은 사진의 일이며, 이제 미술은 추상의 길, 실재 자체가 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매체의 물질성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자신으로부터 추방해 버린 모더니즘 미술은,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의 어두운 환영성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스스로 실재가 되고자 한 대표적 미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시대 지금 여기서 우리는 어두운 환영의 이미지와도 다르고 실재가 되고자 욕망한 모더니즘 미술과도 다른 이미지 또는 미술들과 조우하고 있다. 스스로 가짜 ? 모방 ? 재현임을 숨기지 않거나, 모조이자 환영의 이미지를 현실의 부스러기들과 직조하는 가운데 오히려 실재를 누출하는, 오히려 현실의 속물적이거나 상투적인 진면목을 밝게 비추는 미술이 그것이다. 나는 그러한 미술을,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는 그러한 미술의 이미지를 ‘밝은 환영(Simulacrum Lucida)’이라 부르겠다. 진짜의 조명(illumination)이자 비춤(enlightenment)인 모조로서의 밝은 환영.


2. 정연두의 진사(眞寫)를 시뮬레이션 하는 관객을 위한 (反)가이드
그림처럼 눈이 내리는 가운데, 한 아이가 푸른 색 모자에 머플러를 하고, 입으면 결코 추울 리 없을 듯한 파카까지 뒤집어 쓴 채 드라마 <겨울연가>에 나온 것과 비슷한 오솔길에 서 있다. 우리로부터 등을 돌리고 눈 쌓인 숲 속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이 상황은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이다. 별 내용은 없어 보이는 이 사진이 한편으로는 너무나 그림 같아서, 아니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찬찬히 뜯어보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내리는 눈은 구슬 모양의 스티로폼이 공중에 매달린 것이고, 오른쪽 하단에는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키 높은 사다리의 한쪽 다리도 보인다. 게다가 분명 사진의 분위기로는 시간이 늦은 저녁인 듯한데, 키 작은 꼬마아이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그렇구나! 때는 낮인데 꼬마가 응시하고 있는 숲 속 어딘 가로부터 누군가 아이 쪽으로 강렬한 조명을 비추고 있어 주변이 밤처럼 어두운 것이로구나. 이런 사실들을 알아챈 순간, 우리에게 이 사진은 더 이상 일상의 어느 순간을 기록한 한 장의 스냅사진, 단순한 기념 혹은 풍경사진이기를 멈추고, 뭔가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든 사진, 세트 안에서 연출된 사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근이 제대로 맞는 저 후경의 울창한 수풀과 바닥에, 나뭇가지에 이불처럼 쌓인 눈은 완강하게 이 사진을 현실의 한 기록으로 붙들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 사진이 진짜 사진인지 시뮬레이션인지 결정할 수 없다. 진(true)/위(lie)를 가리는 우리의 인식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불안하게 동요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카메라 렌즈 앞으로 펼쳐진 진짜풍경 혹은 연출된 장면을 렌즈 뒤에서 이미지로 포착한 주체와 이 포착된 이미지에 이름을 돌려주어야겠다. 이 이미지의 생산자 또는 창작자는 작가 정연두이고, 우리가 ‘진짜’인지 ‘시뮬레이션’인지 불안해한 사진은 그가 최근에 하고 있는 시리즈 사진 작업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정연두라는 작가가 다음과 같은 작업을 했던 작가라는 점을 안다면, 이 최근작들 또한 진짜를 찍은 사진이기보다는 시뮬레이션사진이라고 예단할 것이다. 정연두는 이 시리즈 이전에 <내사랑 지니(Bewitched)>와 <원더랜드>와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해 사진작품을 선보였다. <내사랑 지니>는 작가가 2001년부터 진행해온 작업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청취해 그들이 이루지 못했거나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 이루고 싶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선망을 가상적으로나마 작가가 작품을 통해 실현시켜 주는 프로젝트다. <원더랜드>는 <내사랑 지니>와 연장선상에 있지만 꿈의 주인들이 유치원생들로 더 어려졌고, 그들의 ‘원더풀 드림’을 그들이 그린 그림으로 파악해서 사진이미지로 실현시켜줬다는데 차이가 있다. 어쨌든 이전에 한, 두 프로젝트 사진 작품들을 묶는 키워드는 ‘꿈(희망/환타지)’이다. 그래서 혹자는 정연두의 새로운 시리즈 사진 작품을 보면서, 이 사진들 또한 꿈의 ‘시뮬레이션’일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새 작업에도 환상적인 요소가 보이고, 사진이 포착한 풍경은 우리가 현실에서 조우하는 것보다 몇 배는 영화적이거나 드라마틱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프로젝트에서처럼 의도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이 사진들은 유일무이한 누군가의 꿈을 일시적으로나마 사진으로 대리 충족시켜주고자 한 것이라기보다는 광고나 영화에서 본 듯한 상투적인 꿈 이미지를 사진으로 재현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어린이들의 황당한 상상력을 물질적으로 현실화시켜 본다는 의미보다는 대중문화가 배출하는 물질적 욕망을 다시 물질로 모사한 듯 하다. 그래서 오히려 특별한 의도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논하려고 하는 은 어떤 의도의 작업일까? (그의 작업은 언제나 의도와 개념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이 사진 시리즈는 명시적으로는 아무런 키워드나 개념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작품의 표면에 아무런 키워드나 개념도 ‘드러나지 않음’이 시리즈의 트릭이자 핵심이라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드러나지 않음’은 모든 것이 이미지의 표면에 ‘밝게 드러나 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연두의 은 ‘밝은 환영(Simulacrum Lucida)’인 것처럼 보인다. 즉 디지털 테크놀로지 덕분에 어떠한 이미지도 합성 ? 변조될 수 있고, 온갖 기교의 가상적 이미지가 실재를 위협하는 이 시대,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사진이미지에 대해서도 전적인 믿음을 갖지 않는 시대에, 오히려 아무런 의도나 개념도 없이 ‘진짜’를 제시하는 것, 이것이 정연두의 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진짜 풍경’을 ‘모조 풍경’으로 오인하도록 덫을 놓고, ‘사실’과 ‘시뮬레이션’의 요소들이 모두 한 지면에 드러난 사진에서 숨겨진 의도(사실은 없는 의도)와 은폐된(사실은 은폐되지 않은) 사실/시뮬레이션의 경계를 어딘가에서 찾아보는 헛수고를 부추기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정연두의 작품은 진(짜)사(진)인데, 관객은 시뮬레이션으로 보는 상황이다. 처음에 이 글에서 언어로 묘사한 어린이 사진은 덜하지만, 실제로 시리즈의 다른 사진들은 이런 혼란을 부추기는 측면이 더 강하다. 예컨대 저 멀리 산의 능선이 아름답게 굽이치는 한 사진에는 노골적으로 연극무대 같은 사각형 틀과 커튼, 가짜 벚꽃나무가 보이고, 그것을 배경으로 노년의 등산객이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이 무대세트가 진짜 세트인 것일까, 아니면 뒤의 산들이 진짜인 것일까? 어떤 시골 동네 풍경을 찍은 듯한 또 다른 사진에는 전경의 조무래기 아이들과 후경의 동네 사이로 흰 선이 가로지르는데, 언 듯 보기에 영사막의 끝자락 같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땅바닥이 천으로 만든 가짜 땅인 것일까, 뒤의 풍경이 이미지를 투사한 스크린인 것일까? 암벽타기를 하고 있는 여자를 찍은 사진은 어떤가! 사진에서, 뒤에 위치한 산의 능선을 기어오르는 검은 실루엣이 진짜 암벽을 타는 사람일까? 아니면 각목으로 만든 가짜 암벽임이 확연히 드러난 앞의 산을 타는 여자가 진짜 세트장에서 연기하는 사람일까? 이 모두가 진짜이다. 왜냐하면 이 사진들에서 진짜와 가짜는 구분 없이 현실 공간에서 서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극무대 세트와 가짜 벚꽃 나무는 실제 산에 설치해서 찍은 것이고, 아이들이 노는 가짜 땅은 실제 시골 마을에 펼쳐진 것이며, 가짜 암벽은 실제로 암벽이 있는 산의 한 귀퉁이에 가설된 것인 것이다. 이 모든 정황은 내가 추론을 통해 밝혀낸 사실이 아니라, 사진의 표면에 고스란히 혹은 뻔뻔하게 드러난 사실이다. 반복되지만, 정연두의 사진은 진(짜)사(진), 명명하자면 ‘진사(眞寫)’이다. 또한 모든 의도와 트릭과 진짜 ? 가짜가 드러난 이미지, 즉 ‘밝은 환영’이다. 그럼 우리 감상자는 이러한 진사, 밝은 환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는 관객을 위해 다음과 같은 (反)가이드를 준비했다.
Ⅰ. 이 사진들에서 진짜 풍경과 모조를 구분하려 들지 말라.
Ⅱ. 그래도 꼭 구분을 해야겠다면, 수수께끼를 풀 듯 재미로 하라. 물론 진짜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는 손해 볼 각오를 하고.
Ⅲ. 우리가 일상을 사는 공간이 얼마나 상투적인지, 그러나 이질적인 사물들의 집합인지, 사진의 디테일을 보면서 즐겨라.
Ⅳ. 한 때 우리가 꿈꾸었던 영화 속의 삶들, 한 때 우리를 설레게 했던 잡지 속 먼 곳의 풍경들, 한 때 우리가 즐겨 읊조렸던 유행가의 낭만이 지금 보면 얼마나 ‘깨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지 정연두의 사진을 보며 반추해 보라.
Ⅴ. 진짜 풍경 앞에 확연히 드러난 이 가짜들, 모조들, 연기(演技)를 마음껏 즐겨라. 세상 현실이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Ⅵ. 이 가짜들, 모조들, 연기를 만들고, 조합하고, 감독한 작가의 노고를 치하하라. 그 덕분에 우리는 살짝 뒤집어진 세상의 껍질 한 자락을 본 것이니까.
Ⅶ. 마지막으로 긴장하자. 진짜를 가짜로 숨기고 있는 이 사진이 얼마나 진짜로 자신이 있으면 이렇게 가짜를 당당하게 가시화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요즘 흥미를 끌고 있다는 드라마의 한 대사를 변조해서 말하자면, “설사 진짜가 가짜를 진짜로 숨기고 있다고 치자. 진짜가 가짜대신 진짜로 가짜 노릇을 하는 데는 그 가짜진짜가 얼마나 무서우면 그렇게 하겠는지 생각해봐. 진정성을 걸고 하는 일 아니겠냐고.”


3. 밝은 시뮬라크럼과 어두운 실재
“가시성들은 시각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가시성들은 차라리 능동과 수동의, 작용과 반작용의 복합체들이며, 또한 빛에 의해 나타나게 되는 다(multi)-감각적 복합체들이다.” (Deleuze, 『Foucault』중에서)
질문은 정연두의 ‘진사’를 즐겁게 탐사해 본 연후에 떠오른다. 디지털 사진, 컴퓨터 ‘포샵질(포토샵으로 이미지 수정 혹은 변조하기)’로, 사실(현존)의 기록이라는 사진의 진실성은 이제 별로 신뢰할만한 것이 못 된다. 정연두의 은 사진의 이러한 현실 지형과 역사적 지층에 근거를 둔 작업이다. 즉 진짜를 찍은 사진에도 ‘가짜’라는 의심의 칼날을 대보는 것, 시뮬레이션이미지가 실재를 압도해 버리는 상황에 대한 비틀기인 것이다. 그 비틀기는 ‘정면의 비틀기’이다. 진짜 현실에 모조 현실을 동거시켜 실제의 시공간에서 한 장의 사진으로 찍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여기에는 촬영 이후의 변조나 리터치가 없다. 그런데 질문은 정작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왜 굳이 한 장의 사진에 진짜풍경을 오히려 가짜로 보이게 하려하고, 그러한 의도를 사진 속에서 감상자가 수수께끼를 풀 듯 발견하도록 ‘가짜’를 삽입 혹은 전경화 하는 것인가? 왜 가파른 산기슭에 가짜 암벽이라는 가설무대를 설치하는 수고를 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에 조악하게 만들어진 나무나 스티로폼 눈을 덧붙이는 것일까? 물론 그 이유를 우리는 앞에서 논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편에서 생각해 본 것이다. 즉 우리 현실은 ‘진짜’와 ‘시뮬레이션’의 경계가 모호함, 고도로 발달한 이미지 조작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진짜 현실도 모조처럼 보이기를 욕망함, 이런 상황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시리즈, 트릭이 밝게 드러난 트릭으로 화답 혹은 반응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 공간은 굳이 이렇게 작가가 가짜 세트 혹은 모조된 사물을 덧붙이고, 그것을 통해 현실성과 모조성을 대비시키지 않더라도, 영화 같은 일이, 드라마 같은 상황이 넘쳐나지 않는가? 그러니 작가는 어쩌면 그가 진정 진짜를 가짜로 오인하는 상황이나 현실의 모조적 성격을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했다면, 아무런 장치의 덧붙임 없이 현실의 세부로 파고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전작 <내사랑 지니>에서 사진의 주인공들이 소망했던 꿈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서만 잠깐, 완벽하게가 아니라 ‘부족하게(almost)’이루어진다.(그의 작품집 제목은 『Dreams come true, almost』이다.) 우리는 이를 결국 주인공들의 소망은 여전히 ‘백일몽’ 상태이고, 작가의 작품만이 꿈을 실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와 연계해서, 은 여전히 우리 현실 삶의 진실성과 허위는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 ‘우리 현실은 진실과 허위가 뒤섞여 있으며, 그 구분은 어렵다’는 작품의 지적인 개념 층위만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연두의 이라는 시뮬라크럼은 밝게 빛나지만, 우리의 실재는 여전히 어두운 채로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말의 진정한 의미로, 진짜의 조명이자 비춤인 모조로서의 밝은 환영은, 정연두의 작품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부득불 떠오르는 것이다.



미스터 원더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어

작가, 큐레이터 패트리샤 엘리스
슈퍼맨은 솔로몬 그런디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것으로 돈을 벌지 않았지. 그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는 없을 것이기에 슬프다네. [1]

슈퍼히로의 이중적 삶은 부러워할 만한 것은 아니다. 클라크 켄트는 항상 나약한 신문 얼간이의 역할을 영원히 과장스럽게 연기해야만 했다. 브루스 배너는 히치 하이킹으로 미국을 횡단하며 어수룩한 사람을 고문했다. 백만장자로서 자선을 베풀면서도 외롭고 고립되었던 브루스 웨인은 세상의 친구가 아닌 고용된 집사였고 십대 써커스도망자였다. 또한 피터 파커는 그 어떤 이들보다 흥미로운 성생활을 즐겼지만, 반인간 반거미로서의 심리적인 상처는 커다란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그들의 위대함을 대신해 지불해야할 댓가였던 것이다. 그들의 흠집 난 분신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이고, 그들 역시 우리 중 일부가 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불완전함인 것이다.
한국 어딘가에 역시 꽤 겸손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사진작가이며 자신의 영어가 완벽하진 않지만 때때로 영어를 가르친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과 어린 아들이 있다. 여가시간에 그는 요리하기를 즐긴다(스팸 스프를 잘 한다). 그는 또한 댄스교습을 받고 있고, 산을 탄다. 그는 친절하고, 정직하고 유머러스한 그저 평범한 사나이다. 외면적으로는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대중 속에 표나지 않게 묻히는 정연두는 평범한 인간임에서 그의 능력을 끌어내고 있다. 아무도 그를 미스터 원더풀이라고 의심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불완전한 영웅적 자질이 종종 과소평가된다. 잘 생긴 외모, 좋은 직업, 뛰어난 업적과 같은 실체적인 것에 가치가 부여된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성공이 만족스럽지 않을 만큼쉽게 얻어지기도 한다. 저소득자들의 양심적 부, 못생긴 사람의 내적인 아름다움, 외로운 사람의 따뜻한 인정처럼 실패는 더욱 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꿈을 꾸기. 그 꿈들은 세상에 대한 특히 그들 자신 그대의 모습으로 영웅스러운 것에 대한 비밀스런 선망이다. 이들의 이중적 삶은 아틀란티스만큼이나 잘 숨겨져 있다.[3]
현실에서는 크립톤돌도 없고 렉스 루터도 없고 오직 반복과 일상성과 고립만이 있을 뿐이다. 냉소주의에 굴복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잃어간다는 끊임없는 위협만이 있다.

정연두에게 슈퍼영웅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꿈 이상이다. 이것은 그의 동기가 된다. 그는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함을 안다. 일반적인 슈퍼영웅의 기준으로 보면, 정연두는 아마추어 정도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 혁명가이며, 긍정적 사고와 친절함이라는 단순한 행위로 무장한 이 미스터 원더풀은 선을 승리케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 보라, 정연두는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논쟁의 요지가 있을지도, 혹은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정연두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도시의 전설일지도 모른다. 좋다, 그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당신이 믿는다면, 정말로 믿는다면, 그의 마술은 당신에게 감염될 지도 모른다. 작은 노력만 하면 당신도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슈퍼 룰 1: 차이를 만들려 노력해라, 비록 그것이 작다하더라도.

모든 슈퍼영웅은 비밀무기가 있다. 정연두의 비밀무기는 카메라이다. 정연두 작품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 사진이라는 개념에 근거한다. 매크로에 대한 마이크로의 승리를 담아내는 순간적 버튼 누르기, 긍정적인 것을 중요히 여기며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뷰파인더는 선택적으로 악을 제거한다. 각 필름 프레임은 시공간을 초원한 불변의 평행적 우주를 담아낸다. 그의 사진은 의심의 여지없는 새로운 리얼리티로, 그 곳에서는 틀린 것도 옳은 것이 되고, 단점도 장점이 되고, 일상이 꿈이 된다. 사진 속에서 모든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슈퍼영웅은 가장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다. 상록 타워는 도시의 익명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고층 건물이다. 냉정한 현대성의 구체적 상징이자 21세기 초반 오피스 워커와 어린이들의 인간 개미 집합소. 서울은 정연두의 각색된 고담시인 것이다. 그 단단한 성안에서, 그는 소중하고 보호되어야 할 삶을 위해 출동한다.
정연두는 사진을 마치 엑스레이로 보는 시각처럼 사용하여 현실의 거친 표면을 토막내는데, 이것은 그 표면 아래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표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 채 지나친 것들의 마술적 힘을 발산한다. 그 곳에 놀라운 사적인 세계와 꿈꾸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된 완전한 왕국이 있다.
18호는 전통 예술에 관심이 많은 음악을 사랑하는 가족이다 그들의 아파트는 어린 딸과 딸의 핑크 토끼 친구를 위한 색색의 놀이터로 변한다.
17호는 지식인들의 모임. 그들은 세상을 여행하고 세계와 소통하며 그들의 전통에 대한 긍지를 높여간다. 아파트의 벽을 가족사진, 서예, 기념품 부엉이 시계로 장식하고 있는 그들은 그 자신의 집에서 탐험가가 된다.
16호는 유행의 첨단 속에서 산다. 값비싼 가죽 가구와 미니멀적인 인테리어 디자인은 그들의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15호는 항상 이동하며 정착하지 않은 가족이다. 쉴 편안한 가구도 없다. 대형 시계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그들의 바쁜 라이프스타일에 필요한 것들만 있다. 악마가 게으른 자들을 위해 있다면, 이 가족은 선의 전형이다.
13호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왕족쯤으로 상상한다. 중산층 아파트 주민이라는 것이 아라비아 궁전에서 살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을 누를 순 없다. 매일 그들은 왕들의 위엄을 경험한다.
정연두의 사진이 그저 주변 환경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그 사진들은 그 자신의 관계들의 순간의 기록인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 있는 모습을 사진 찍는 데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을 주는 과정인 우정이 쌓여야 된다는 것이다. 경험과 꿈을 나누고, 세상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확대시키는 과정. 상록 타워는 32 가족들로 이루어져있고 이들 가족모두의 이름과 성격, 직업, 취미를 작가는 알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그는 그 가족들의 꿈 이상의 것을 제시한다. 바로 그들의 우정을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이미지에서 정연두는 관람객과 사진 속의 인물들 간의 중매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사진은 이러한 소통을 통해 좀 더 작아진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공동작업은 과정 그 이상으로 바로 그것이 예술인 것이다.

슈퍼 룰 2: 친근감 있게 대해라, 서로를 아끼라.

슈퍼 룰 3: 당신의 장점을 알려라.

사람을 처음 만나는 일은 항상 거북하다. 중매 에이전시는 당신의 생애를 몇 단어로 요약한다. 모든 소중한 디테일은 숨겨진 뜻을 읽기 어렵도록 사본에 기록된다. 정연두의 작품에는 TV 토크쇼의 특성이 있다. 그가 뛰어나게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의 가장 내적인 환상이다. 자극적인 성도 사회적 변태도 아닌 진정으로 개인적인 것, 즉 우리의 가장 소중한 욕망 말이다. 꿈은 자아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꿈을 나눈다는 것은 가장 용감한 행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냐가 아니라무엇이 되고 싶은가 이다.
판타지는 논리에 반해 항상 단순하고 환상적이기 때문에 당혹스럽다. 남극을 여행하겠다는 꿈을 꾸거나, 마리메코 천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살겠다는 것이나, 일급 요리사가 되겠다는 것이나, 나이트 크럽에서 사랑에 빠지겠다는 것이나, 〈탑건〉의 톰 크루즈와 같은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밝히는 것은 자신에게 모욕적일 것이다. 〈안녕. 내 이름은 밥이야. 난 항상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스푼으로 연주를 하고 싶어했지〉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4]
정연두는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다는 식의 확신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훨씬 더 모험적인 것이다. 그는 가장 영감적인 즐거움으로 훔쳐보기를 제안한다. 그는〈훔쳐보기〉를 〈나누기〉로 순화시킨다. 그의 사진은 수치를 즐거움으로 바꾼다. 〈내사랑 지니〉에서는 정연두는 이러한 금지된 것을 차이의 축제로 만들었다. 그의 수많은 여행 중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현대판 외로운 방랑자처럼 여행하며, 그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온전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꿈을 이루게 해주는 것은 마술을 거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공동작업은 수개월이 걸리는데, 그동안 서로 의미 있는 관계를 쌓고,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살리면서 그들의 판타지를 재현하는 것이다. 꿈꾸는 자의 욕망과 작가의 시선이 여기서 합쳐지게 되는 것이다. 각각의 판타지를 위한 도움을 구하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사람이 참여하게 된다. 한사람만으론는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없다. 작가는 디자인 회사, 작은회사들, 세계적 전문가들, 학교 어린이들, 한국 군인들을 참여시켰다. 한 사람의 꿈을 이루는 것은 수천만의 꿈이 되었다. 정연두의 사진은 용기의 상징이고, 영감과 가능성, 선의의 기념탑인 것이다.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그는 애타주의라는 마술을 부린다. 그 결과 하나의 이미지, 즉 잠깐 동안 일어나는 꿈이 얻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더 큰 마술 즉 믿음의 힘의 기념품일 뿐이다.

슈퍼 룰 4: 선의는 전염성이 있어서 퍼진다.

슈퍼 룰 5: 아이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배울 수 없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오늘날 믿음은 잊혀진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소망과 행복의 순박한 것이다. 순수는 항상 자기억제를 포함한다. 경이와 놀람은 단순한 감정이며 어린이들의 감정인 것이다. 빗자루를 탄 마법사, 꽃동산 공주들, 무지개와 사탕 나무의 요술나라. 아이들은 의심없이 미스터 원더풀을 믿는다. 그리고 작가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원더랜드〉에서 작가의 가장 최근 공동작업자는 유치원 어린이들이다. 그들이 그린 드로잉을 기반으로, 정연두는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환상 세계를 사진속의 현실로 재창조하였다. 아이들의 그림 속의 막대인간들은 십대모델들이 특별히 디자인된 옷을 입어서 재현되고, 요정들은 포토몽타주를 통해 하늘을 날게 되고, 서투른 크레용으로 그려진 왜곡된 그림은 원근법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정연두 사진의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이의 상상의 세계가 어른의 세계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점이다.
5살 아이가 그린 꽃을 든 두 명의 남자와 아기그림은 즐거운 게이 결혼식으로 재탄생 되었다. 우산을 든 광대는 학교 밖에 서 있고, 우중충한 건물은 아이의 눈에는 매혹적인 천국이 된다. 농부 소녀에게 금을 주고 있는 왕자의 그림은 멀리 도시의 고층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서울의 뒷골목에서 낭만적으로 재탄생되었다. 작가가 재현한 것은 인공적인 무대가 아니다. 그의 사진은 세상에서 오직 선만을 보려는 아이들의 타고난 의지를 반영하는 그럴듯한 어른들의 청사진인 것이다.

슈퍼 룰 6: 마법을 믿는다면, 당신은 어디서든지 마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슈퍼는 범죄를 범하지 않을 때, 그는 틀림없이 모든 걸 그만두고 사람들의 편이 되어 숲 속의 타잔과 함께 할 유혹을 받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시에 머물며, 그의 일이 끝날 때까지 더러운 전화 부스에서 계속 옷을 갈아 입었다. [5]

아무런 비밀스런 삶도 그 어떤 이중생활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봐라. 그 세상에서는 꿈이 일상현실 속의 소중하고 용인되는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슈퍼맨은 더 이상 루이스 레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헐크는 공격성 매니지먼트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배트맨은 그의 집 아래 동굴에서 나오고 그의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보통의 차를 사고, 적절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반거미인 사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나, 우리는 피터 파커의 공격에 더 관대해 지는 것을 배울수 있을 것이다. 이 어떤 것도 악에 대항에 싸우는 그들의 능력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그들을 더욱 풍부한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위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것도 아니고 극적인 것도 아니다. 어떤 기장도 망토도 바지 위에 입는 속옷도, 비밀스런 굴도, 마법의 힘도 없다. 선의의 슈퍼영웅이 되는 것은 철학일 뿐이다. 이 철학은 정연두에게도 우리에게도 있는 어떤 것이다. 힘, 용기, 친절, 사랑, 열려진 맘과 완전히 정직한 것, 관용과 나눔. 영웅적 행위란 집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긍정적인 행위에 의해서 전파된다.
서울 어딘가에 사진기와 꿈을 가진 그저 평범한 사나이가 있다. 정연두가 잠자리에 들때 그는 피곤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다. 그가 무엇을 꿈꾸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맘 깊숙이 꿈은 정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바랬던 것이 아닌 더욱 더 소중한 어떤 것. 좋은 꿈 꾸세요, 미스터 원더풀. 그리고 감사합니다.


[1]크래쉬 테스트 더미의 〈슈퍼맨 노래〉의 가사. 트랙 3. 나를 따라다니는 귀신들, 아리스타 레코드, 1991.
[2]아, 메리 제인이 천장에 붙어있을 수 있는 남자와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이여!
[3]플라톤이 언급한 고대의 사라진 신비의 도시. 바다 속으로 침몰해 인어가 지키고 있다고 전해짐.
[4]“나는 다이애나 왕자예요. 내가 정말로 빨리 돌면, 내 옷은 총알이 발사되는 팔찌와 성조기무늬의 수영복으로 바뀌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행기를 타죠”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5]크래쉬 테스트 더미의 〈슈퍼맨 노래〉의 가사. 트랙 3, 나를 따라다니는 귀신들. 아리스타 레코드,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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